생각은 원래 저 깊고 어두운 심연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심연의 표면에서 물결이 찰랑찰랑 일렁인다. 갑자기 파도와 거품과 보풀이 솟구친다. 공중에 떠올라 머리와 몸통을 까뒤집어 둘러싼다. 그 순간 생각에 흠뻑 젖는다. 생각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생각은 그렇게 심연의 어디쯤에서 갑자기 치솟는다. 버스에서 앞사람 뒷모습을 보고 옛날에 사귀었던 사람이 퍼뜩 생각나기도 하고, 밤길에 골목을 걷다 무서운 생각이 퍼뜩 떠오르기도 하고, 찬물로 세수하다 잃어버린 시계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내기도 하고, 회의 중에 상사 질문에 답을 떠올리기도 한다.

생각은 이렇게 나기도 하고 내기도 한다. 어떤 것을 보고 생각나는 것이 감상(感想)이다. 그 생각이 뇌리에 착 달라붙으면 착상(着想)이다. 생각을 내는 것은 실마리를 잡아 끌어올린다는 말이다. 연상(聯想)이다. 그렇게 끌어올린 생각을 가닥을 잡아 쌓으면 구상(構想)이 된다.

감상의 감(感)은 마음 심(心)과 모두 함(咸)을 합한 말이다. 모두 함(咸)은 도끼날이 붙은 창(戌)으로 목을 내려치니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거나 두려움을 이기려고 있는 힘을 다해 입(口)으로 소리치는 모양이다.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치다’라는 뜻에서 ‘다하다’라는 의미가 생겼다. 입(口)이 하나 더 붙어서 소리칠 함(喊)이 되었다. ‘고함(高喊)치다’나 ‘함성(喊聲)’ 따위에 쓴다. 그러니까 내 몸에 무언가가 와서 마음(心)에 어떤 작용을 가하는 것이 감(感)이다.

감은 밖에서 오기도 하고 안에서 오기도 한다. 주로 밖에서 오는 것을 오감(五感)이라 한다. 시, 청, 후, 미, 촉이다. 안에서 오는 것은 현대에 들어 해부학이 발전하면서 그에 맞게 용어를 만들어 사용한다. 위나 방광의 내용 충만 정도를 알아내는 내장감각, 관절이나 근육의 긴장도를 느끼는 고유감각, 중력의 방향을 지각하는 평형감각 등이 있다.

상(想)은 퍼뜩 떠오른 생각이니 내 몸의 안팎에서 들어온 감각이 마음에 어떤 작용을 가하여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감상(感想)이다. 감상은 네 가지 과정을 거친다.

첫 번째는 내 몸의 순수한 느낌 단계다. 이 느낌이 마음에 무엇인가 작용을 가하려고 하는 단계다. 하지만 아직 마음이 움직인 것은 아니고 오감과 몸속 감각만 있을 뿐이다.

두 번째는 감각에 대한 내 몸의 반응 단계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마음이 작용이 관여한다. 기쁘거나 화나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사랑스럽거나 밉거나 하고 싶거나 하는 칠정(七情)이 관여한다. 마음속 심연의 표면에 칠정이 일렁이는 감정(感情)이다.

세 번째는 갑자기 생각이 솟구치는 단계다. 생각이 퍼뜩 떠올라서 생각이란 것은 알지만 그 생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단지 생각이 일어났음을 인정(認定)하는 단계다.

네 번째는 생각에 둘러싸여 젖는 단계다. 이때 비로소 그 생각이 무엇인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생각을 의식(意識)하는 단계다.

감(感)→정(情)→인(認)→식(識)

우리는 같은 길을 출근할 때 수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만진다. 신체의 내부 작용도 마찬가지다. 심장은 1분에 100번 넘게 뛰고 1초에 한 번씩 호흡하고 내장기관은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움직인다. 감(感)이다. 갑자기 도로가 막히거나 차가 고장 나거나 해서 지각이라도 할 것 같으면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고 안 보이던 것도 보이고 심장 뛰는 소리도 들리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불안하다. 정(情)이다. 그 사이에 마음속에서 지각을 안 하는 무수한 방법이 비누거품처럼 떠오른다. 인(認)이다. 그때 문득 택시 타면 늦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식(識)이다.

인식(認識)에는 말(言)이 있어서 감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다. 어떤 프로젝트를 수주한 뒤 저녁에 회식하면서 수주 과정에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이 모두 감상이다. 책을 읽고 생각을 글로 나타내면 감상문(感想文)이다. 영화를 보고 SNS에 리뷰를 쓰면 그것도 감상문이다. 게시판 글을 읽고 남긴 댓글도 감상문이다.

감상문을 자주 써 보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감상문이란 것이 내가 느낀 대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보면 책 내용을 요약해 놓고 감상문이라 쓰는 사람이 많다. 감상문에 책 내용이 전부가 마지막에 한 줄로 ‘좋았다’하고 마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은 감상문이 아니다.

감상문은 내가 느끼고 생각한 바를 쓰는 것이다. 느낌을 적을 때는 민감(敏感)한 사람과 둔감(鈍感)한 사람의 차이가 분명하지만, 오감과 칠정으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오감 글쓰기는 무엇이든 오감으로 써보는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표현해 본다. 예컨대,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길에 서서 은수(이영애 분)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상우(유지태 분)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리자. 그 장면에서 들리는 길거리 소음, 냄새, 입맛, 바람이 살에 닿는 느낌을 써 보자.

칠정 글쓰기는 상우의 마음을 희로애락애오욕으로 각각 표현해 본다. 그리고 다시 감정을 섞어서 표현해 보자. 예컨대, 은수가 헤어지자고 할 때 그 말을 들은 상우는 어떤 냄새를 맡았을까? 그 냄새는 은수를 미워하게 할까? 아니면 더 사랑하게 할까? 미우면서 사랑하고 기쁘면서 갖고 싶은 다양한 감정을 글로 표현해 보자.

이런 감상문은 읽는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설득이 목적이 아니므로 논리가 맞지 않아도 상관없다. 단지 내 느낌과 생각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만약 내게 느낌과 생각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일단 말을 하거나 글로 쓰는 순간 생각은 저절로 일어난다. 우리는 실제로 자연을 보지 않고도 자연을 찍은 사진이나 영화, 심지어 자연을 묘사한 글만 읽어도 감흥이 일어난다.

한마디로 감상문을 제멋대로 쓰자. 앞뒤 재지 말고 무조건 써 보자. 내 몸 안팎에서 밀려오는 자극, 그 자극에 대한 정서 반응, 심연의 표면에 일렁이는 수많은 생각, 거기서 떠올라 나를 감싸는 생각. 이것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현하자.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순수한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자.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과정을 직시함으로써 우리는 연어처럼 생각의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 비로소 내 생각의 근원을 찾는다.

요즘은 독서 토론이 많아서 감상문 쓸 일도 잦다. 트레바리라는 스타트업은 돈을 받고 독서 토론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모임에 참가하려면 독서 감상문을 써 내야 한다. 수백 명이 돈과 독서 감상문을 내고 독서 토론에 참가한다. 나도 사람들에게 독서 토론에 참가하고 독서 감상문 쓰기를 권한다. 세상을 다르게 느끼고 생각한 감상을 나누다 보면 착상(着想)을 얻는다. 내가 느끼지 못했거나 떠오르지 않았던 새로운 느낌이나 생각을 잡을 수 있다.

심신을 수련하려고 많이 하는 요가는 감과 정-인-식의 연결을 끊는 것이 목적이다. 힌두교 요가 학파 경전 <요가 수트라>는 요가를 ‘마음 작용의 지멸(止滅)’이라 정의한다. 정에서 시작하는 마음의 작용을 그치고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요가의 수련법은 감은 느끼되 칠정이나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한다. 명상(冥想)하면서 정과 인식이 일어나지 않게 하지만 호흡이나 바람 소리는 느끼게 한다.

힌두 철학을 자세히 보면, ‘마음의 작용이 지멸한다’는 것은 ‘비즈냐나(識)’가 지멸하는 것을 의미하며 ‘즈냐나(慧)’가 지멸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식(識)의 지멸이 혜(慧)를 나타나게 하는 직접적인 방법이나 원인이라 본다. 혜(慧)는 빗자루로 마음을 쓰는 것이다. 감(感)에 의해 식(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感)을 그 자체로 꿰뚫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知慧)라고 하고 혜안(慧眼)을 가졌다고 한다.

<중용>에서 희로애락이 나오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중(中)은, 희로애락을 느끼지 못하는 목석의 상태가 아니라 희로애락에 휘둘리지 않는 중용의 덕 또는 그런 힘이 발휘되는 상태이다. 중(中)을 발휘하면 할수록 희로애락이 질서 있게 나타나는 상태인 화(和)를 완성한다. 불교의 무심(無心)이나 무념(無念)도 마음이나 생각이 빈 것이 아니라 정이나 지식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자기 필요에 따라 수련 방법을 골라 써도 좋다고 생각한다. 혜, 화, 무아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고 어쩌면 평생을 여기에 다 바쳐도 거기에 이를지 모를 일이지만.

평소에도 요가를 하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우스개 같지만 TV를 보거나 강의를 들으면 뇌는 요가를 할 때와 비슷해진다. 뇌의 상태는 교감신경을 측정하여 알 수 있는데, 교감신경이 활성화한다는 것은 감에서 정-인-식으로 이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교감신경이 불활성화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감은 있지만 정-인-식으로 연결되지 않은 상태다.

미국 MIT 미디어랩이 학생들 몸에 교감신경 측정기를 부착하고 일주일 동안 일상생활에서 교감신경이 언제 활성화하는지 측정했다. 원래는 교감신경의 반응을 웨어러블 기기로 측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는데 특이한 결과가 나왔다.

학생들의 교감신경이 활성화할 때는 학교에서 실험하거나 집에서 숙제하거나 혼자 공부할 때였다. 잠자리에 들 때 초반 한두 시간 동안 교감신경이 크게 반응했다. 그런데 TV를 볼 때는 교감신경이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TV는 우리에게 엄청난 양의 시청각 자극을 던짐에도 불구하고 교감신경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과 정-인-식의 연결을 끊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수업이다. 수업을 들을 때 학생들은 TV 시청처럼 교감신경이 반응하지 않는다. 심지어 잘 때만큼이나 교감신경이 조용하다. 참 웃지 못 할 결과다. 학생들은 맑은 정신으로 깨어 집중하고 긴장하고 각성한 상태가 아니라 TV를 볼 때처럼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로 수업을 듣는 셈이다.

혹자는 마침 그 강의가 아주 재미없고 지루한 강의여서 그렇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미국 심리학자 카페터의 연구팀이 실험했다. 한 교수가 같은 내용을 한 번은 유창하게 다른 한 번은 어수룩하게 진행한 동영상을 대학생에게 보여주었다. 강의 동영상을 본 학생들의 강의 평가는 유창한 강의가 어수룩한 강의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강의 직후 학생들에게 내용을 얼마나 잘 기억할 수 있는지 질문했다. 유창한 강의를 본 학생들은 어수룩한 강의를 본 학생보다 두 배 이상 많이 기억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실제로 강의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평가한 시험에서는 두 집단 간에 점수 차이가 없었다. 유창한 강의를 본 학생이나 어수룩한 강의를 본 학생이나 강의 내용을 이해하여 기억한 정도는 비슷했다. 이 연구 결과는 사람이 수동적으로 보고 들으면 감에서 정-인-식으로 연결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사람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말하고 참여하는 과정이 있어야 교감신경이 활성화하여 기억을 하고 생각하는 단계로 나아간다.